“중학생 수준으로 강의해 주세요.”라는 방송국의 출연 조건을 듣자마자 거절을 했다. 그렇게 쉽고 재미있게 강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고 그런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전 국민의 학력이 고등교육 이상인데 중학생 수준으로 낮추라는 말이 옳은가?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중히 사양을 하고 돌아 오면서 또 후회를 했다. 그리고 반성을 하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쉬운 강의를 하지 못할까?” 경상북도 어느 작은 도시에 강의를 하러 갔다. 교육담당자께서 시골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의교안이 너무 어렵다며 걱정이 된다며, 쉽게 잘 풀어 달라고 했다. 두 시간 강의 시간에 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끝난 후, 어느 할머님께서 좋은 강의 잘 들었노라고 칭찬을 하고 가셨다. 시골 어른들이라고 해서 까불고 웃기는 강의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본다. “쉽고 재미 있게, 편하게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과 “시청자들은 중학생 수준으로 강의를 해야 인기가 있다.”는 고정관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쉽고 재미 있는 것만 강의는 아니다. 때로는 어렵고 지겹고 유익한 강의도 필요하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강의할 수
1950년부터 시행된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서 19번이나 1등을 했던 한국이 최근 2회에 걸쳐 2등과 3등을 했다. 중국이 연속 1등을 했다. 예전에는 국제기능올림픽 선수들이 우승을 하고 오면 서울 시청 앞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고, 청와대에서 만찬을 차려 주었지만 요즘엔 신문의 주요 기사거리로 뜨지도 않는다. 기능 기술을 무시하는 증거는 공고와 전문대학의 파괴다. 공고나 상고를 “특수목적고등학교” 또는 “직업계학교”라며 아름다운 명칭으로 바꿨지만 그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기능 기술 교육을 무시하면서, “창피스러운 학문”으로 천시하고 있다. 2020년 아시아 최고의 대학 순위에서 중국이 단연 1등이다.(조선일보, 2020. 12. 7) 중국은 북경대 칭화대 등 5개 대학이 10위권 안에 들어가 있지만, 한국은 10위 안에 든 대학이 한 개도 없다. 서울대 연고대 포스텍 등이 점점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세계적인 유명교수 한두 명을 모셔오기 위해 대학 건물까지 따로 지어준다.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삼성 현대 포스코 등은 물론, K-Golf, K-Food, K-Medical 등이 세계를 휘젓고 있어서 위로가 되지만, 기능 기술과 대학 교육이 흔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해부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건축학자였으며, 화가이며 요리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인으로 살았으며, 공대를 졸업한 엔지니어로서 수학자이며 철학자이고 언어학자였다. “북학의(北學議)”를 지은 박제가는 경제학자이며 시인이고 화가였으며 서예가였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자이고 경세가였으며, 문학자이며 시인이었다. 세종대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 대학의 개혁과 혁신을 주도한다고 하면서 인문계열을 줄이고 공대를 늘린다고 한다. 취직을 목표로 삼아 인재를 키워야 한다며, 각 대학마다 취업실적을 기준으로 평가를 해서 지원금을 배정한다고 한다. 일부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학의 자유를 빼앗아 정부 즉, 교육관할 부처에서 모든 대학을 일률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하고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학문의 가치와 대학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처사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철학자가 없고 음악이 없고, 문학이 없으며, 미학이 없는 나라를 상상해 보라. 의사와 변호사, 공대생들만 있는 국가를 상상해 본다.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전기, 컴퓨터, 보험,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지금까지 필자가 공부한 분야의 과목들이
아주 오래 전, 남한산성 너머에 있는 교도소에서 강의를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들에게 무슨 강의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지만 약간의 호기심도 생겼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마칠 수 있었다. 봉천동의 장애인센터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에게 삶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강의를 해 달라는 거였다. “그 분들에게 내 강의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원한다고 하니 잘 해야겠지.” 생각하면서 수락을 하고 또 걱정을 한다. 강의를 하고 돌아 오니, “좋은 강의 감사하며, 이메일을 쓰느라 몇 시간이 걸렸다”는 인사의 글이었다. 작년 가을, 세종시에 신설학교인 종촌중학교 1학년 250명의 학생들에게 2시간의 강의를 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고민을 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어린이들에게 무슨 강의를? 그것도 체육관에서 250명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교장선생님과 차 한 잔을 하고 강의실에 들어 선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질서정연하게 의자에 앉아 강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진지하게 강의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일어서거나 떠드는 학생이 없었다. 뒤쪽
어머님을 학교에 모셔 와서 교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성적을 올려 달라고 비는 대학생이 있다는 글을 읽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많은 학생들로부터 성적을 정정해 달라는(올려 달라는) 문자와 메일로 교수들은 골치를 앓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12%를 넘어섰고, 체감으로 느끼는 실제 실업률은 더 높다고 한다. 한편, 중소기업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 외국근로자를 쓰는데 어려움이 많고 인건비도 적지 않다는 소식이 들린다(조선일보 2016. 3. 21.).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인정받는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25%가 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대학진학률은 70%가 넘는다. 최근 중국 자동차 회사가 국내에 공장을 지을 거라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가 미국과 중국 등 해외 여러 곳에 공장을 지었다. 그 모든 공장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일자리는 외국과 외국근로자들에게 빼앗기고, 우리 젊은이들은 남의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예상된다.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 온 젊은이들도 취직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나 계약직으로 버티고 있다. 위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우리나라 청년실업 문제는 벌써 십여 년 전에 예상된 일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지혜로워서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현명하지 않으며, 부지런하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느린 사람이라고 불행하지도 않다. 그건 그때그때 다르다. “합리성과 지성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Rationality and Intelligence)”에 관한 글이 뉴욕 타임즈에 실렸다(Gray Matter / SEPT. 16, 2016. NYT).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과 지식 또는 지성은 다르다는 거다. 많이 알고 있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오히려 배운 사람들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이나 합리적인 결정과 행동은 지식이나 교양과 관계가 없는 것 같다. 피도 눈물도 없는 승자 독식(勝者獨食, The winner takes all.)의 경쟁이 일어나는 상황은 뉴욕의 월가(Wall Street)에서 일어난 폭동에서 볼 수 있다. 무지막지한 소득을 올리는 금융가의 탐욕에 시민들이 돌을 던졌지만 어느 누구도 그 돌을 맞거나 반성하진 않았고 지금도 변한 건 없다. 그냥 코웃음만 쳤을 것 같다. 우리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읽을 줄도 모르고 글을 쓸 줄 몰라요.” 어느 출판사 사장과 대화 중에 들은 충격적인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이 되어 하는 소리인 줄 안다. 한글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문장의 이해력과 문장 구성 능력이 없다는 거다. 스스로 책을 읽거나 글을 써 본 적이 거의 없어, 책의 문장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 글을 왜 썼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생각을 정교하게 정리하고 다듬어서 글로 표현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강의 시간에 백지에 질문을 받아 보거나, 어떤 문제를 풀도록 하고 발표를 시키고 토론을 하게 하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질문과 대화의 수준이 높지 않음을 발견한다. 말과 글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학생 수준 높은 어휘나 정교한 문장을 찾을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혹시 자신에게 질문을 말을 걸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이렇게 계속 내버려 두어도 되는 걸까? 안타까울 뿐이다. 어려서부터 주입식 교육으로 암기만 하게 하고, 4지선다형 문제만 풀어 보았으니 정해진 답을 고르는
“영어 공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제가 맡은 일을 잘 하게 될지 불안합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총 10년 동안 영어공부를 하고 입사한 신입사원이 강의시간에 내놓은 질문이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 온 사원이 영어 공부 방법을 묻고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누구 잘못인가? “장자크 루소와 피타고라스, 세종대왕이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비교 분석하라.” 오래 전, 어느 기업의 대졸 신입사원 채용을 위한 면접시험에 외부 면접위원으로 참석하여 입사지원자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어느 지원자 한 명이 “헐~!” 하고 나가버렸다. 이게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평균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생각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됩니다.”라고 핑계를 대는 입사지원자는 아예 생각도 없는 듯이 보였다. 누구 책임인가? 흙수저 출신의 대학교수들과 와인을 마시며 밤 늦도록 “한국 교육 체계와 대학 교과과정의 문제점" 등에 대한 토론을 했다. 대학의 기능과 역할을 잃은 대학에서 빨리 명예퇴직을 하고 싶다는 교수의 말씀이 씁쓸하게 들렸다. 요즘 거론되는 E 대학의 비리와 부정부패 문제가 정말 그 대학만의
집값이 떨어질까 봐 장애인학교나 복지센터를 혐오시설이라고 하면서 근처에는 오지도 못하게 하고, 여러 지역에서 어린아이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날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교통질서와 언어폭력이 난무하고 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일을 한 적이 있어, 이 글을 쓰기에 떳떳하지 않으나, 국민소득 2만불이 넘어도 시민의식과 생활방식은 1만불도 안 되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필을 든다.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바, 그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이 땅의 지도자들이 “교양 있고 품격 있는 시민”이 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수준 이하의 언어를 제멋대로 표현하는 것은 리더의 자질에 한참 부족한 것이다. 아무리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그만한 자리에 가 있다면 교양과 도덕이 우선 중요하다. 행동과 언어가 일치해야 하며, 그 수준이 선진국의 리더들보다 나아야 한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책임과 사명이며 의무다. 2,500년 전, 의성 히포크라테스는 “훌륭한 의사는 아플 권리가 없다”고 했다. 훌륭한 지도자는 게으르고 무식할 자유도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 장사를 하든, 사람은 누구나 강한 부분이 있고, 약한 점도 있으며, 부족한 면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히 인정받고 싶고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사랑 받고 싶고, 존중 받고 싶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망이 있다. 특히, 권력의 맛을 보거나 재물에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강한 열정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처럼 보여서 좋은 자리나 위치에 가고 싶으면 아래와 같이 행동하면 된다. 첫째,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형용사와 부사를 많이 사용한다. “아름다운 정치”, “착한 예산”, 깔끔한 경쟁”, “부드러운 결정”, “아주 특별한 관계”, "절대적이고 극단적인 결정" 등과 같은 표현을 많이 활용한다. 그러면 아무리 치졸하고 지저분한 내용을 담은 전략과 꼼수도 예쁘게 보이고 그럴듯한 모양새로 느껴진다. 속으로는 어떤 꿍꿍이 전략을 갖고 있거나 말거나, 내심 불안한 측면이 있어도, 말하고 글을 쓸 때는 최대한 “아름답고 예쁜 언어”로 포장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짓이 진실처럼 왜곡되지 않도록, 진실이 거짓으로 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