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못지않게 '일과 공부의 균형(Balance with Work and Learning)'이 의미하는 바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6월 11일자 파이낸셜 타임즈 사설에 “일하며 배우고, 공부하며 익히는 것(Learning by doing and Doing by learning)만큼 강한 학습은 없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은 못해도 공부를 좋아하며 책만 읽는 선비가 있고, 무식한 듯 하면서도 일은 잘하고 돈을 잘 버는 사업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가정이 엉망진창인 집도 있지만, 적당히 어렵게 살면서도 화목한 집안도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학자나 선생님이 되거나, 사업 잘 하는 경영자가 대학원 최고경영자(CEO)과정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경우라면 매우 좋겠습니다. “설마 그런 사람이 있겠어?”라고 따지는 사람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필자는 공부를 좋아하면서도 형편에 따라 사느라 이른 나이에 공장을 다니며 20여 년간 직장에서 열심히 일만 했는데, 우연히 강의를 하고 책을 쓰게 되어 후반기 삶에서 '딱 맞는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런
코로나 감염 양성이 나와서 불안해졌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목이 쉬는 듯하여 격리 신청을 했다. 구급차가 싣고 가서 내려 준 곳은 영등포의 한 요양병원이었다. 이동하지 말라며 데려간 입원실은, 오랫동안 병실에서 기저질환으로 고생하시는 어른 환자분들 5명이 누워계셨다. 안내해 준 침대에 누우면서 걱정을 했다. 여기 계신 노인들은 모두 기저질환이 심한 중증환자들인데, 감염이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앞섰으나 같은 환자로서 필자는 힘이 없었다. 혹시나 옮겨 줄까 하면서 기다린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질병과 사투를 벌이며 노인들과 코로나 환자를 돌보는 요양보호사들이 안쓰러웠다. 퇴원은 각자 하라는 말을 듣고, 의사소견서만 받아 들고 나와서 전철을 타려다가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최근 확진자가 많이 나오는 요양병원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듯했다. 코로나 3년째 접어들면서 전 세계 감염자는 4억 2천 600만 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589만 명을 넘겼다. (TIME, 2022. 2. 23) 미국은 감염자 7천 852만 명, 사망자 93만 명, 영국 감염사망자 15만 명, 러시아의 사망자는 20만 명에 이른다. 비극적인 상황이지만, 한국은 감염자 233만
“홍 박사님, 이번 모임에 꼭 나오시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박사가 아니고, 박사님들 모이는 자리에 제가 무슨~~”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양보를 했다. 박사학위 없이 18년째 대학강의를 하면서 늘 불편했다. 지방대학 박사과정이라도 들어가서 공부를 더 하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끈질기게 공부할 자신이 없었다. 대충하기는 더욱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년 동안 강의 기회를 준 몇몇 대학에 감사할 뿐이다. 아무리 강의를 잘 해도 박사학위가 없으니 정식 교수는 될 수 없었다. 일반대학 4년간 시간강사를 포함하여 인터넷 사이버 강의를 하면서, 학기가 바뀔 때마다 재임용에서 탈락될까 봐 불안했고, 임용기간이 한 학기씩 연장될 때마다 고맙고 감사했다. 때로는 학력과 관련된 서류를 위조(僞造)하고 싶었고, 거짓말로 때우고 싶었지만, 그럴 줄도 몰랐고, 그렇게까지 해서 '교수'라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거짓말을 하면 얼굴과 눈빛에 나타나는 즉, 낯이 두껍지 않은 얼굴을 가졌다. 대학 강사료는 기업 강의에 비해 적었지만, 대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보람과 '교수인척 할 수 있음'에 견딜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기업이나 공공단체 등에서 더 많은 강의를 하다 보니, 일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어린이에게 투자하는 것이다.(The solution to poverty? Invest in kids. 뉴욕타임즈, 2021. 12. 6)” 본 칼럼에서 “조기교육의 품질(Quality early Education)”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교육부, 국가교육회의, 국회 교육위원회, 대학구조개혁위원회 등은 한국의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공공기관 또는 단체들이다. 이렇게 많은 전문가들이 진정으로 고민을 하고 연구하면서 미래교육을 발전적으로 이끌어 가는지 의심이 든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말과 글이 가벼워지고 문해력(文解力)이 약해지고, 수학이 어려워서 포기하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요즘, 교육정책은 국어 영어 수학을 100시간 줄이자고 하며,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지 말자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듯 하다. 어려운 과목은 가르치지 말고, 민주시민교육을 한답시고 “색다른 사상교육(?)”을 하려는 모양이다. 어려워도 공부는 제대로 해야 한다. 힘들어도 배워야 할 학습내용의 기초학문이 바로 문사철(文學, 歷史, 哲學)이다. 철학은 수학과 연결되어 있고,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알 수
'승자독식(勝者獨食, Winners takes it All)'은 틀렸다. 그렇게 해서 이 사회는 돌아가지 않는다. 자동차 한 대가 나오는데 수천 명이 함께 일을 한다. 보이지도 않는 반도체 칩(Chip) 한 개를 만들고, 스마트 폰 한 개를 만드는 과정은 수백 단계의 공정을 거친다. 여기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규모와 크기에 차이는 있지만, 모두 급여를 받고, 일한 만큼 먹고 살고 있다. 다리를 놓고 아파트를 짓는 현장을 보라. 어찌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고 했다. 사회 구성원은 어느 누구도 혼자 일하지 않는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혼자 일하는 사람들은 심한 고독과 우울을 느끼며 '정신적 건강의 위기(Mental Health Crisis)'를 겪고 있다. 명동에서 평생 구두를 닦고 고치는 할아버지가 전남대학교에 12억 원을 기부하셨고, 영화배우로 일생을 사신 어른께서 500억 원을 기부하셨다. K 산업의 회장이신 할머니께서는 700억이 넘는 돈을 카이스트에 기부하시며 노벨상을 받는 과학자가 나오기를 기원하셨다. 이들은 돈을 벌었다고 혼자 갖지 않았다. 필자의 지인 중에는 대학에서
“과학만으로는 병든 사회를 고칠 수 없다(Science alone can’t heal a sick society. Jay S. Kaufman)”는 2021. 9. 11. 자 뉴욕타임즈 칼럼이다. 적극 공감하면서 두어 번 읽었다. 마스크를 거부하는 사람, 백신 접종을 거절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의학의 힘을 의심하거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가는, “일부 질병관리 담당 공직자나 정치꾼들”이 많은 국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조심하고 주의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잘 정리되어 있다.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거나 국가가 패망의 길로 들어 섰다면 어찌 과학과 의학으로 치유할 수 있겠는가?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로부터 문법학, 수사학(修辭學), 철학과 천문학, 윤리와 도덕 등을 골고루 가르쳤다. 요즘도 가끔 펼쳐 보는 빨간 책, 1962년 뉴욕에서 출간한 “과학의 역사(A History of the Science, Stephen F. Mason)에는 로마 그리스시대의 자연 철학자들로부터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리적 우주론(Physical Cosmology)과 피타고라스의 평균율은 물론,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맞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움(the L
“미국 양당주의의 대승리(“Triumph of U.S. bipartisanship”, JoongAng Daily, Koichi Hamada, 2021. 9. 6)”, “우리의 미래는 과거에 빠져들고(“Drowning our future in the past”, NY Times, Maureen Dowd, 2021. 9. 6), “미국의 새로움, 전쟁의 두려움(‘America’s New, Disturbing of War’, NY Times, Samuel Moyn, 2021. 9. 6)를 기반으로 작성한다. 오늘, 2021년 9월 6일의 주요 외신을 읽으면서 한국의 현재를 생각한다. 미국, 영국, 독일 등이 수십 년 동안 두 개의 정당으로 국가를 통치해 온 것에 비해 한국은 1945년 해방 이후 200여 개의 정당이 등록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인물 중심으로 변해왔다. 이들에게 통치철학이나 애국심을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이라고 해서 올바른 교양을 갖추었거나 지적인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최근에 다시 깨닫고 있다. 변호사나 교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라고 해도, “평판과 품성이 같지 않다(Reputation is not
“중학생 수준으로 강의해 주세요.”라는 방송국의 출연 조건을 듣자마자 거절을 했다. 그렇게 쉽고 재미있게 강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고 그런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전 국민의 학력이 고등교육 이상인데 중학생 수준으로 낮추라는 말이 옳은가? 나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중히 사양을 하고 돌아 오면서 또 후회를 했다. 그리고 반성을 하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쉬운 강의를 하지 못할까?” 경상북도 어느 작은 도시에 강의를 하러 갔다. 교육담당자께서 시골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의교안이 너무 어렵다며 걱정이 된다며, 쉽게 잘 풀어 달라고 했다. 두 시간 강의 시간에 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끝난 후, 어느 할머님께서 좋은 강의 잘 들었노라고 칭찬을 하고 가셨다. 시골 어른들이라고 해서 까불고 웃기는 강의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본다. “쉽고 재미 있게, 편하게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과 “시청자들은 중학생 수준으로 강의를 해야 인기가 있다.”는 고정관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쉽고 재미 있는 것만 강의는 아니다. 때로는 어렵고 지겹고 유익한 강의도 필요하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강의할 수
1950년부터 시행된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서 19번이나 1등을 했던 한국이 최근 2회에 걸쳐 2등과 3등을 했다. 중국이 연속 1등을 했다. 예전에는 국제기능올림픽 선수들이 우승을 하고 오면 서울 시청 앞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고, 청와대에서 만찬을 차려 주었지만 요즘엔 신문의 주요 기사거리로 뜨지도 않는다. 기능 기술을 무시하는 증거는 공고와 전문대학의 파괴다. 공고나 상고를 “특수목적고등학교” 또는 “직업계학교”라며 아름다운 명칭으로 바꿨지만 그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기능 기술 교육을 무시하면서, “창피스러운 학문”으로 천시하고 있다. 2020년 아시아 최고의 대학 순위에서 중국이 단연 1등이다.(조선일보, 2020. 12. 7) 중국은 북경대 칭화대 등 5개 대학이 10위권 안에 들어가 있지만, 한국은 10위 안에 든 대학이 한 개도 없다. 서울대 연고대 포스텍 등이 점점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세계적인 유명교수 한두 명을 모셔오기 위해 대학 건물까지 따로 지어준다.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삼성 현대 포스코 등은 물론, K-Golf, K-Food, K-Medical 등이 세계를 휘젓고 있어서 위로가 되지만, 기능 기술과 대학 교육이 흔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해부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건축학자였으며, 화가이며 요리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인으로 살았으며, 공대를 졸업한 엔지니어로서 수학자이며 철학자이고 언어학자였다. “북학의(北學議)”를 지은 박제가는 경제학자이며 시인이고 화가였으며 서예가였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자이고 경세가였으며, 문학자이며 시인이었다. 세종대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 대학의 개혁과 혁신을 주도한다고 하면서 인문계열을 줄이고 공대를 늘린다고 한다. 취직을 목표로 삼아 인재를 키워야 한다며, 각 대학마다 취업실적을 기준으로 평가를 해서 지원금을 배정한다고 한다. 일부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학의 자유를 빼앗아 정부 즉, 교육관할 부처에서 모든 대학을 일률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하고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학문의 가치와 대학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처사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철학자가 없고 음악이 없고, 문학이 없으며, 미학이 없는 나라를 상상해 보라. 의사와 변호사, 공대생들만 있는 국가를 상상해 본다.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전기, 컴퓨터, 보험,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지금까지 필자가 공부한 분야의 과목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