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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준우 칼럼] 다시 스무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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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 하나 있다.

"지금의 생각과 느낌, 가치관, 기준을 그대로 갖고 스무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해보겠는가?"

 

마흔이 가까워오면서 다양한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일자리 제안도 그렇고, 관리자로서의 제안도 받는다. 뭔가 의미있는 일들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욕구가 올라와서 밤잠을 설친 적도 있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하루하루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던 나,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슬픈 학창시절의 내모습을 아는 나, 그런 내가 조금은 의미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하고, 다양한 경험들을 생각하고 있음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다시 스무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라는 조건.

당연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계획대로 되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러나 솔깃한 제안은 아닐 수 없다.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던지간에, 지금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후회로 가득 찬 10대 시절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스무살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다.

 

반대로, 60대가 된 나를 생각해보곤 한다.

다시 마흔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해보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될 60대의 전준우. 60대가 된 전준우는 40살의 전준우를 생각하면서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 스무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들과는 다소 다른, 그 나이에 맞는 희망사항들을 나에게 던져보지 않을까.

 

최근에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작은 실수가 있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최종마무리가 되어 가는 도중에, 초기에 작성한 보고서 자료를 최종마무리가 거의 끝난 보고서에 덮어씌우기 해서 저장해버린 것이었다. 퇴근시간은 다가오는데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모든 업무가 초기화되어버렸고, 최종 담당자는 한숨을 내쉬며 "이제 내가 할테니 거기까지만 하세요."하고 이야기했다. 나중에는 너무 수고했다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혹시나 내 마음에 생채기라도 날까 싶어 세밀한 배려도 해주는구나 싶은 마음과 더불어 허탈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 날, 친한 지인들을 만나 식사를 하던 도중 업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10대, 20대 때는 말이야. 그런 일들이 생기면 욕 한바가지 먹으면 끝날 수 있는 문제였어.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되게 뭐라 그러네', 하면 끝나는 일이잖아. 근데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은 조금 다르다는 걸 느낀다. 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을 실망시켰다는 그 허탈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오더라. 그게 참 무섭더라."

 

함께 식사를 하던 지인은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평소 뛰어난 업무능력과 추진력으로 나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준 친한 동생이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는 여자분이 계시는데, 박사학위까지 딴 분이거든요. 하루는 저한테 '아무개씨, 이것 좀 해주세요. 나중에 제가 만든 자료랑 같이 취합할게요.'하고 업무를 부탁하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정리해서 저녁무렵에 자료를 전달드렸는데, 제가 정리한 자료보다 훨씬 넓고 깊이 있는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갖고 계신 거에요. 그 때 '아, 이 사람들은 나랑 다르구나. 난 그동안 뭐했지?'하고 느꼈습니다. 박사학위가 대단해서라기보다는, 나보다 앞서나가는 사람들의 생각에 내가 못미치는 걸 발견하게 되는 거죠.“

 

‘지적 쾌감에 대한 희열, 그 반면에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에 대한 회의감. 충돌되는 이해관계가 나를 발전시키는 것을 본다. 그 감동이 너무 커서 엉엉 울고 싶은 감정들이 수시로 올라온다.’

 

고전 탐구수업을 하던 어느 날 새벽, 노트 귀퉁이에 적은 글귀다.

 

만약 다시 스무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지난 시간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0대와 30대를 거치면서 마냥 헛되이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겠지만, 아쉽게 흘려보낸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그만큼 발전의 여지가 남아있기에 가능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40대의 전준우로 돌아가고 싶은 60대 전준우의 소망은 어떤 것일까,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풍부한 지혜와 지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가 될 수 있는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었더라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을 한번쯤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사람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도 누군가를 실망시켰을 때의 감정을 세밀하게 느낀다.

학습지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똑 부러지고 공부도 잘해서 무척 예뻐하던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내 업무용 컴퓨터를 갖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며 혼을 냈고, 시무룩해진 그 여학생은 제자리로 돌아가서 남은 문제집을 풀었다. 한참 뒤 문제집을 갖고 왔는데, '실망'이라는 단어로 문장을 만드는 문제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늘 선생님은 나에게 실망했다.'

 

나는 그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생님은 한 번도 민지에게 실망하지 않았어. 선생님은 결코 너희들에게 실망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여학생은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갔고,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급기야 나도 눈물을 쏟고 말았다.

 

"오빠, 남자아이들은 다르게 키워야 된대.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인지시켜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에게서 인정받는 것에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고 하더라."

 

하늘이 선물해주신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들은 말이다. 어디 남자아이만 그럴까? 모든 인간은 인정을 갈구한다. 누군가의 실망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고통만큼 크다.

 

30대가 넘어가면서, 사람이 전부라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과, 그들의 실망스러운 눈초리를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실감과 상처를 만드는 것인지도 알았다. 10대, 20대 때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계였다. 경제적인 안정, 시간적 여유, 가정의 평안,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내 앞에 주어져 있다.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을 고민하기에 앞서, 마흔이 되어서조차 올바른 지혜를 배우지 못했음을 초로에 접어든 나이에 후회하기에 앞서, 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나를 만드는 것, 그래서 오늘 하루에 충실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두 번째 스무살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렇게 조금씩, 나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