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우리가 잘 아는 <변신>을 쓴 작가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했다. 많이 읽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깊이 읽어 깨닫고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책을 왜 읽어야 하고, 공부를 왜 해야 할까?' 또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습관적으로 읽고 습관적으로 공부하지는 않는가.
교육이란 세상의 다양한 가치들을 삶처럼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아름다운 것과 도덕적인 것을 강렬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앎을 추구하는 존재다. 오감을 통해 배우고 경험과 학문을 통해 앎을 추구해 나간다.
그런데 경험으로 배우는 것과 학문을 통해 배우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좀 더 명확한 질문은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그 답을 찾는다. 경험과 오감은 수동적인 앎이다. 그러나 학문은 능동적인 앎이다. 경험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왜 그러한 사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는 못한다.
즉, 우리는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왜 뜨거운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학문을 통해서만이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다.
공부의 참뜻이 여기에 있다. 공부는 지식을 쌓는 행위이자, '왜'라는 질문을 얻고 스스로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공부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학문(學問)이라는 단어에 '묻다(問)'라는 글자가 포함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 교육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떠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어떠한 문제를 발견하는 안목을 기르는 데 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를 발견할 수도,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도 우리는 교육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릴수록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생선을 잡아주는 지금의 주입식 교육으로는 어렵다. 직업 전문가를 양성하는 오늘날의 전통적인 교육은 노예를 양성하는 공부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자율성과 존엄성, 행복한 삶을 위한 순수한 배움의 추구가 배제된 성공지상주의 교육은 참교육이 아니다.
지식을 얻는 방법과 지식을 창조하는 능력은 '왜'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가르치고 배우도록 해야 한다. 동력의 전달 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개념과 원리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이 기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