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방 2칸짜리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그 곳에서 2년 정도 살았던 기억이 난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세숫대야와 호스가 있는 곳이 주방이었고, 화장실은 공동화장실이었다. 주인집은 나와 동창인 친구네 집이었다. 가끔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레고를 갖고 놀았는데 '왜 우리 집에는 레고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어떤거?"
"니가 만 원 갖고 갔나?"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거짓말하지 말고."
"안 갖고 갔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댄 적이 있다. 오락실이 가고 싶은데 용돈만으로는 부족했다. 3천원인가 4천원을 몰래 꺼내서 오락실에 갔다. 며칠 뒤 엄마가 물었고, 나는 순순히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지 않았다.
5학년과 2학년은 불과 3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만원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1992년에 만원은 9살짜리 꼬마에게 상당히 큰 돈이었다. 경제관념이 없었기에 100만원이면 집도 한 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때였다. 깡패들한테 돈 빼앗길까봐 무서워서 오락실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둘러댈 구실도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했기 때문에, 아버지 지갑에서 만원이라는 돈을 훔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작은 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이불, 책, 누나와 내 옷이 정돈되어 있는 장농까지. 9살 인생 아들의 생각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숨겨두었을 만한 곳'을 샅샅이 살펴보며 만원을 찾으셨다. 교과서, 일기장, 이불, 책상 서랍을 샅샅이 뒤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보, 아들이 안 훔쳤다고 하잖아요. 인제 좀 그만해요."
"당신은 가만히 있어. 어릴 때는 돈을 보면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훔칠 수도 있는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는 엄마의 이야기도 듣지 않았다. 한참을 누나와 내 책상이 놓여 있는 작은 방을 뒤지면서, "아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만원을 내놓으면 아빠가 용서하고 통닭을 한 마리 사줄텐데..."하고 이야기하셨다. 1992년, 그 때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젊은 36살이었다.
한참 뒤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셨다. 티비를 보고 있던 나는 아버지에게 "찾았나?"하고 물었고, 아버지는 "아니."하고 대답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만원을 훔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 만원은 찾을 수 없다.
고상한 철학적 가치를 운운하려는 건 아니지만, 믿음 안에서 사랑이 만들어지고, 믿음 안에서 성공이 만들어지고, 믿음 안에서 인류의 모든 역사가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믿음보다 큰 건 없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고 사업을 하고 책을 쓰는 것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의 일부 아닌가. 당시 나는, 아버지가 아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 표현력이 부족해서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 그 때 받은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마음을 발견하기 전까지, 아버지는 늘 무섭고 두려운 분이자, 아들을 믿지 않는 분으로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나를 믿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내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들을 믿는다. 아들이 훔쳤을지라도 나는 아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들이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믿는다."라고 이야기해주었더라면, 그리고 "아빠는 걱정이 되었을 뿐이란다. 아빠가 틀린거라면 용서해다오. 어떤 경우에라도 나는 아들을 사랑한단다."하고 이야기해주었더라면, 내 마음 속에 아버지는 더 크고 선명한, 위대한, 그리고 가장 어려울 때 제일 먼저 연락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을텐데.
스티븐 R. 코비Steven R. Covey는 '선택할 힘과 자유를 원칙에 따라 겸손하게 사용할 때 사람,문화, 조직, 전체 사회가 도덕적 권위를 얻는다'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도덕적 권위Moral authority는 '단기적이고 이기적인 이해관계로 형성된 사회적 가치가 아니라 원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용기'라고 이야기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 83p, 김영사)
통제적 사고방식은 조직사회에서 주로 통용되는 사고방식으로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직원이나 조직 구성원들을 수평관계에 있는 동료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 구조의 아랫부분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부속품이나 대체제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반면에 도덕적 권위는 겸손, 친절, 배려, 수준 높은 양심으로 말미암아 신뢰할 만한 영적, 감성적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1인기업가, 프리랜서, 예술인, 더 나아가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들을 구상해내고 상품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든 조직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단기적이고 이기적인 이해관계로 형성된 조직(학교, 회사, 직장, 거래처, 군대 등)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생활한다. 도덕적 권위보다는 통제적 사고방식controlled thinking이 더 먹히는 조직사회 속에서 지내다 보면 도덕적 권위의 중요성을 망각하기 쉽다. 자연스럽게 권위에 의존하게 되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다.
도덕적 권위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상식이 언제나 융통성 있게 활용되거나 지식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음주운전, 성추행과 성폭행, 불법유턴, 보복운전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도덕적 권위라는 것에 대해 이론으로 배운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실제로도 그렇다. 도덕적 권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렇기에 잘 띄지 않으며, 관심을 바탕으로 한 관찰이 아니면 느끼는 게 어렵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상당히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도덕적 권위가 상당히 뛰어나고 수준 높은 어휘력을 사용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통제적 권위를 가진 조직사회나 인물들은 나와 맞지 않았다. 상당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말 자체를 별로 하지 않는 'INFJ'의 특성상, 그 속에서 나만의 견고한 리더십을 구축한다거나 지적, 영적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세밀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나에게는 없었기에 통제적 권위와 분위기를 가진 조직사회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게다가 고집이 세고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성격 때문에 강한 리더십을 갖고 있더라도 통제적 조직사회에서나 어울릴 만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습관이 생겼다. 반면에 도덕적 권위로 중무장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100% 신뢰하며 인간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습관도 생겼다. 도덕적 권위를 바탕으로 비전과 열정을 키워나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깊은 존경심을 느낀다.
언젠가 아들에게 "아들, 이제 아빠랑 한글 공부하자."라는 말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자식에게는 절대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과 달리,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들은 18개월째에 한글을 뗀다거나 30개월째 되던 해에 영어원문을 줄줄 읽는다는 식의 깜짝 놀랄만한 성장을 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느리게 성장하지도 않았다. 20개월이 지나면서 문장으로 말을 만들어서 사용했고, 몇몇 영어단어를 사용해서 우리 부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도덕적 권위가 아닌 통제적 사고방식을 갖고 아들을 대하려는 자세가 나의 내면에 숨어 있는 한, 귀중한 나의 아들도 아버지의 고루한 믿음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도덕적 권위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실패를 다양한 매체와 인생 속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모두 믿음이 부족했다. 조직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믿음은 도덕적 권위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다. 두바이는 믿음에서 시작되었고, LA도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믿음이 없이는 어떤 것도 형상화할 수 없다.
30년 전 그 때를 생각하다 보면, 지금도 자다가 눈을 뜨곤 한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아버지, 제가 안 훔쳤어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