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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준우 칼럼] 질문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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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읽었다. 존 버니언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세계적인 고전이다. 종교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고전문학이라는 선입견만 없다면, 펼치는 순간 글의 깊이에 압도당한다. 그만큼 수준이 높은 책이다.

 

책은 한 남자가 꿈에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의 여행기를 기록하면서 시작된다.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고, 위기를 만난다. 그리고 험난한 여정 끝에 비로소 천국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크리스천의 아내와 아이들이 뒤따라 길을 떠나는 내용은 천로역정 1부가 끝나고 수년이 지난 뒤에 2부로 출간되었다. 너무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므로 한 번 읽고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천로역정을 고전 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고전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꼽으라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성경과 질문의 깊이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왕과 왕비,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지만,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성경은 사람이 가진 마음의 흐름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들(소심, 대담, 믿음 등)이 천로역정에서는 등장인물들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매우 수준 높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

 

살다 보면 누구나 나름의 권위(Authority)를 가진 과정들을 만난다. 처음에는 권위의 수준이 높지 않다. 학생들에게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이 권위를 가진 과정이다. 이미 그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권위가 높지 않다. 4년제 학사과정을 마친 성인이 책 한번 읽어보지 않고 초등학교 3학년 중간고사 수학시험에서 무리 없이 만점을 맞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그 권위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주로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0대의 끝에는 수학능력시험, SAT,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라는 권위가 던지는 질문에서 가장 정확하고 지혜롭게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생들만이 (등급대로) 대학생이 될 수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해답을 가진 학생들은 엘리트 그룹으로 선별된다. 대학생이 되면 한층 더 수준 높은 질문들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정확한 해답이 없다. 알아서 찾아야 한다. 리포트, 논문, 석박사 과정이 그 예다. 대학을 졸업하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선택지로 이동하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위치에 맞는 권위가 있고, 거기에 걸맞은 해답을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높은 질문 체계의 권위를 가진 단계는 사법시험이며, 법을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직업의 특성상 그 권위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판사가 아닐까 싶다. 좌우지간 대부분의 권위는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에 걸맞은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삶의 한 과정이자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천로역정은 인간이 세운 학문이 아닌 성경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해답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상당한 권위가 있다. 그리고 무지, 수다쟁이, 사심, 구두쇠 등 부정적인 면모를 가진 순례자들의 대답은 조악하고 힘이 없는 반면 믿음, 소망, 담대, 경건, 자비심과 같은 순례자들의 질문과 대답은 상당한 힘과 지혜가 있다. 마음의 힘에 따른 내면의 차이다.

 

역사를 톺아보면 성경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는 책들은 대부분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파스칼의 <팡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모두 성경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는다. 성경 그 자체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문고전이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기록한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때로 말과 질문에 졸한 사람들을 만난다. 쉽게 사람을 잃고,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위치나 경제력과는 무관하다. 이처럼 적절하지 않은 말과 질문은 내면의 깊이를 낮추지만, 적절한 말과 적절한 질문은 내면의 깊이를 더한다. 얕은 책은 얕은 질문은, 훌륭한 책은 대부분 훌륭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독서가 중요한 이유다. 올바른 질문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이번 기회에 천로역정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