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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준우 칼럼] 고전 탐구생활이 나에게 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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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두 달 전부터 진행하고 있는 인문고전 탐구 모임이 있다. 매주 정해진 요일 새벽 6시부터 1시간 반 동안 일정 분량의 고전을 읽고 발표하며 의견을 나누는 모임인데, 생각 외로 흥미로운 경험들을 많이 한다.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과 고전을 읽고 발표하며 의견을 나누는 1시간 반(대개 1시간 반을 넘기고 2시간가량 토론하기 일쑤다.)의 시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사색으로 말미암은 감동으로 가득 채워지곤 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나, 직업을 통해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지는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추측이 대개는 맞아떨어진다. 고위직 공무원이나 전문직 종사자, 전문 경영인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같을 리는 없다.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하는 이유다.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목표의식을 갖고, 똑같은 기준을 갖고 산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다른 예도 있다. 어떤 모임에서 무슨 활동을 하느냐를 통해 그 사람의 관념과 가치관을 확인할 수도 있다.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내진 않았지만, 경제적인 여유와는 거리가 먼 활동들을 하며 삶에 의미를 찾는 일들을 주로 해왔던 나와 경찰 공시생이었던 아내는 벌어둔 돈이 없어서 단출하게 신혼을 시작했다. 부모님에게서 절반을 지원받고, 절반은 신혼부부 대출을 받아서 자그마한 빌라를 매매로 얻었다. 지은 지 20년이 넘어가는 흔한 동네 빌라였다. 가진 것 없는 우리 주제에 대단히 훌륭한 아파트나 저택을 구매할 여력은 없었다. 그렇기에 별로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고, 딱히 불편스러운 것도 없었다. 그러다 아들이 태어나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들에게 더 좋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나의 좁고 편협한 시각 때문에 아들이 좁은 세상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돌아보는 눈이 뜨여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역적 텃세가 심한 곳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내와 나는 활동지역이 동네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었고, 관계는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맺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거주지 반경에 있는 아이들과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라는 말도 있듯이, 내 아이가 마주하게 될 아이들은 대개 이웃주민들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내게 있어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탈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앞서 밝힌 바 있다. 내게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책과 거리가 멀고, 부정적인 단어를 습관적으로 남발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며, 옹졸하고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게다가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에 찾아오는 기회를 습관적으로 무시해버리는 사람들(Poor, Pass Over Opportunity Repeatedly)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봤을 때, 우리가 사는 곳 근처의 이웃 주민들은 대단히, 매우, 상당히,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꽤 오랫동안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언제 어디서 도움을 주고받을지 모르는 일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떡을 해서 돌리고, 궁금한 게 있으면 먼저 연락해서 물어보았다. 이웃집 어린아이들에게는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를 쥐어주며 “건강히 자라거라.” 하고 덕담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고, 성장하지 않았다. 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를 대했고, 형식적인 인사치레 외에는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10여 년 간 지켜본 결과 준중형 승용차가 중형 승용차로, 중형 승용차가 준대형 승용차로 바뀌는 식의 변화 외엔 삶에 어떠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웃주민들의 삶이라는 것이 대개 그런 식이었다.

 

반면에 어느 지인은 갖은 고생 끝에 상당히 큰 사업적 성장을 일구어내면서 삶을 큰 폭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는데, 그의 삶 속에서 보이는 여유와 안정감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그의 아이들도 대부분의 주변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활동들(자가 요트를 타고 낚시 투어 다니기, 학교 마치고 서핑 수업하기, 방학기간 동안 크루즈 타고 유럽 대륙 투어 하기 등)을 통해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의 성장과 변화가 경제적 안정으로 끝나버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되었으나 가정이 불행하다던지, 겉으로 보기엔 나름 성공한 사업가로 보이는데 법적인 문제에 휘말려서 갖은 고초를 겪는 부자들을 꽤 많이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 사람의 성공스토리 정도로 인식한다면, 그의 성공 역시 부러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도전의 대상 정도로 느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 있어서 그가 '정말 멋있는 삶을 산다.'하고 느꼈던 포인트는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그는 사업을 키워나가는 와중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엄청난 규모의 서재를 빼곡히 채우다 못해 여기저기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들을 소유한 애서가이자 다독가였다. 무엇보다 새벽마다 가지는 인문고전 탐구 프로그램도 그런 배움의 활동들 중 하나였다. 그런 활동들이 그로 하여금 더 깊은 사색으로 말미암은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리란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고전에는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깊은 지혜가 숨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해석과 풀이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읽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맥락을 이해하는 정도이거나 글자 수 헤아리기 정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인도자의 도움이 없으면 별다른 진척이 없을 듯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접하게 된 고전 탐구 모임은 그런 내적 갈증을 해소해주는 기회이자 훌륭한 인맥을 선물해주는 소통의 경로이기도 했다.

 

나에겐 인생을 바꿀 자유도 있고 더 나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있지만, 생각의 수준이 달라지고 깊어지지 않는 한 그런 기회에도 한계가 있었다. 경험의 폭과 시각의 범위가 좁고 낮았기 때문에 품위 있는 대화나 모임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그렇기에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과 나누는 대화들이 마음에 깊게 심기워지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음은 물론이다. 무엇이든지 일단 시작하면 10년을 바라보고 진행하는 성격 때문에 차근차근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나가고 있다.

 

“크산토스여! 왜 내게 죽음을 예언하는가? 정말 너답지 않구나.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죽을 운명임은 나도 잘 아는 바다. 그렇다 해도 트로이아인들에게 전쟁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해주기 전에는 나는 결코 쉬지 않으리라.”

-일리아드 19장 420절

 

준마 크산토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음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아킬레우스가 던진 대사다. 죽음의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위대한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알리는 복선伏線의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면, 오직 명예와 영광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전은 다양한 방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풍부한 어휘를 활용할 수 있는 활용 방법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고전을 공부하면서 아들과 대화할 때 언어가 달라짐을 느꼈다. 아들이 “비누 어디 갔어요?” 하고 질문하면 “세면대 위에 있어.” 하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검은 세균의 군단들과 힘 있게 싸우는 비누는 물을 만나면 나쁜 세균들을 검은 하수구 속으로 흘려보내서 영원한 전쟁의 굴레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힘이 있지만, 오랫동안 물과 함께 있다면 순두부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워져서 위대한 장군에서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단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몸을 지켜줄 수 있는 훌륭한 곽 속에서 틈이 날 때마다 잠을 자야 해.” 하고 말하는 식이었다. 의도하고 한 말도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 사용하는 언어의 형태가 달라짐을 느끼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제 겨우 두 돌이 지난 아들은 병원에서 5~6살 정도의 어휘력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 라이너스 폴링

 

생각은 수많은 변수를 갖추고 있으므로, 형상화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기에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최선의 생각을 골라내기 위해서는 변별력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좋은 생각은 많이 생각하는 습관에서 비로소 형성된다. 많이 생각하지 않으면 삶 속에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결과들만 얻게 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엮이게 된다.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사고력과 분별력의 부재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전 탐구와 사색이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나,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충분히 시간과 돈을 투자할 만하다. 관심이 생긴다면 지금 바로 도전해도 좋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읽고 생각하라는 것이지, 고전을 집필하라는 게 아니지 않은가. 놀랄 만한 인사이트는 읽고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